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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2편, 고조선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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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 기원전 108년)은 단군왕검이 세웠다고 전해지는 한반도 최초의 고대 국가이며, 태조 이성계가 건국한 조선과 구별하기 위해 흔히 고조선(古朝鮮)으로 칭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의 역사학계는 일반적으로 고조선이 청동기 문명을 기반으로 한 현 중국 랴오닝성 및 북한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강원도에 있던 고대 국가라고 파악하고 있다.

역사

- 단군 조선

《동국통감》외기에는 “동방은 애초에 군장이 없었는데 신인이 박달나무 아래로 내려오니 나라 사람들이 임금으로 모셔 단군이라 하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으니 요임금 무진년이다. 처음엔 평양에 도읍하였고 나중엔 백악으로 옮겼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제왕운기> 역시 건국 연도를 무진년으로 기록하고 있고, 《삼국사기》에도 단군의 건국을 다루고 있으나 즉위 연도를 밝히고 있지는 않다.

 

고조선의 건국을 다루는 단군 신화는 환웅으로 대표되는 청동기 문명을 가진 외래 세력과 곰으로 대표되는 토착 세력의 결합을 통해 건국된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으로는 조선으로 지칭되는 불특정 한 소규모 지역 집단의 집합체가 초기 고조선의 사회모습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 초기

고조선은 기원전 7세기의 기록으로 알려진《관자》에 제나라와 교역한 사실을 기록함으로써 사서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현대에는《관자》가 기원전 4세기경에 직하학궁의 학자들에 의해 성립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며, 이에 따라 고조선이 중원에 알려진 시기는 최소한 기원전 4세기 이전으로 좁혀진다.

기원전 4세기 중반에는 연나라와 관련된 사료인《전국책》에서 조선이 연나라 동쪽의 유력한 세력으로 언급된다. 고조선이 고대 국가로 성장하여 전국 시대 중국의 국가와 대등한 외교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4세기말에는 연나라와 분쟁이 일어나 고조선 측이 선제공격을 하려다가 중단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중국은 종주국인 주나라가 쇠퇴하고 각 지의 제후들이 왕을 칭하고 있었는데 연나라가 기원전 323년에 왕을 칭하자 고조선의 군주도 ‘왕’이라 칭했다고 전한다.

 

- 위만 조선

기원전 195년에 한나라가 연나라 지역에 임명한 노관이 흉노로 망명한 사건이 일어나자, 연나라 지역은 큰 혼란에 휩싸이고 그곳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고조선 지역으로 망명하였다. 위만은 이들 무리를 약 1,000여 명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왔는데, 상투를 틀고 고조선의 복색을 하였다고 한다.

 

위만은 기원전 194년 중국 군대가 침입하여 온다는 구실을 허위로 내세우고, 수도인 왕검성에 입성하여 준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 이때부터 일반적으로 위만조선이라고 부른다.

 

위만은 유이민 집단과 토착세력을 함께 지배체제에 참여시켜 양측간의 갈등을 줄이고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였다. 또한 중국 문물(대표적인 문물 '철')을 적극 수용하여 군사력을 강화하고, 이를 기반으로 주변의 진번(眞番), 임둔(臨屯) 등의 세력을 복속시켰다.

 

철을 수용함으로서 농업과 수공업이 더욱 발전하였고, 대외교역도 확대되어 나갔다. 이를 바탕으로 강력한 정치적 통합을 추진하였지만, 기본적으로 여러 세력의 연합적 성격을 극복하지는 못하였다. 각 지배집단은 여전히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보유하고 있었고, 고조선 정권의 구심력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중앙정권으로부터 쉽게 이탈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고조선 말기 지배층의 분열도 이러한 이유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